• 반기문, 무슨 수로 보수·진보 아우르나?

      반기문 씨는 패권주의와 기득권주의를 배척했다.
    말 자체로서야 누군들 패권을 좋아하고 기득권을 옹호할 것인가?
    그러나 반 씨의 말은 그보다는 기존 새누리당, 친박, 그리고
    친문을 배척한다는 함축으로 들린다.

      반기문 씨가 운동권에 의해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소리를 들을 길은 없다.
    그러나 반기문 씨 역시 “나는 운동권 후보로도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친문 쪽의 대척점에 서는 건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다.

      그런 그가 친박과 새누리당을 배척하는 것 역시, 그 피치못함을 짐작할 수 있다.
    불리해지기로 작정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가
    “나는 박근혜를 계승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 씨는 이걸 알아야 한다.

  • 박근혜 대통령을 뽑아준 유권자들은 비록 더 이상 박근혜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중도나 중도좌파로 옮겨가지는 않고 여전히 ‘보수’로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반 씨가 이걸 잘못 알고 ‘내가 중도 진보다’로 가면, 그들 보수 유권자들도 덩달아
    ‘우리도 중도 진보로 간다’고 해줄 것이라고 기대해도 괜찮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반 씨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당을 배척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박근혜를 찍어주었던 ‘보수’ 유권자들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말해야만,
    표를 얻어야 할 정치인으로서 제대로 된 계산을 하는 게 될 것이다.

      이럼에도 반 씨와 그 측근들은 지금 이명박 식 ‘중도실용주의’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명박 식 ‘중도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좌파 이념세력에 ‘아침이슬’을 부르며
    두 손 번쩍 들어올리는 투항주의 플러스, 철학-역사관-세계관 없는
    ‘경제주의(economism)'라 할 수 있다. 이래서 이명박과 그 일행은
    좌파 변혁 세력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밀려주고 아첨하고 주눅든 채,
    청와대만 교체했을 뿐 사회권력과 문화권력은 감히 교체할 엄두조차 가지지 않았었고 못했었다.

      반기문 씨가 만약 이명박 식-박형준 식-정의화 식 ‘중도’ 또는 ‘중도 진보’를
    자신의 새 집으로 정하겠다면 그건 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박근혜 후보를 찍어주었던 선의의 보수 유권자들이
    그런 그에게 무조건, 속절없이, 별 수 없이 표를 몰아 줄 것이라고
    자신하지는 않는 것이 신중한 판단일 것이다.

      “보수 유권자들이 가면 어딜 가나, 그들은 우리 말고 갈 데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보수 쪽은 아예 쳐다 볼 필요도 없고, 오히려 중도와 온건진보로 가야 한다”는 게
    친이계-한나라당-새누리당 웰빙족들의 상투적이고 싸가지 없는 말버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수 유권자들은 두 번 다시 ‘중도 아닌 중도팔이’ 속류-무지-저급 정상배들의
    협박(너희가 가면 어딜 가냐?)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성을 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관찰이다.

      반 씨에 관한 보도를 하면서 미디어들은
    그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전략을 쓰고 있다고 전한다.
    사실이라면 어디 한 번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무슨 재주가 있기에 그럴 수 있을까?
    무슨 신비스런 주술이 있기에 사드 배치 반대, 탈미친중, 개성공단 폐쇄 반대와,
    사드 배치 찬성, 한미동맹강화, 개성공단 폐쇄 지지, 햇볕-퍼주기 반대를
    한 데 아우르겠다는 건지, 정말 한 번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
    경제에선 ‘중간(centrist)'이 가능할지 몰라도 안보에선 그게 있을 수 없을 터인데 말이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의원도 “반기문 씨가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냐고 묻는 야당의원도 있다.
    반기문 씨는 이 의문에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얼버무리는 건 안 된다.
    ‘중도 진보’ ‘진보적 보수’ ‘보수-진보’ ‘보수-진보를 아우르는’ 운운은
    전형적인 얼버무림이다.
    양다리 걸치지 말고,
    두 마리 토끼 쫓지 말고,
    자신의 본질을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