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사기 혐의로 기소된 조영남에게 '집유' 언도"송기창 화백, 조수가 아닌 독립된 작가로 참여"

  • '그림 대작(代作)' 논란에 휘말려 형사법정에 서게 된 가수 겸 화가 조영남(72)에게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부장판사 이강호)은 18일 서관 423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사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조영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은 매니저 장OO씨에게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대작화가로 조영남의 그림 제작에 참여한 두 사람(송기창·오OO)의 '숙련도'나 '관여 정도' 등을 볼 때 단순 보조작가가 아닌 독립된 작가로 봐야 한다"며 조영남의 그림이 송기창 등의 도움을 받은 뒤로 훨씬 풍부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인 점과, 대작화가들이 독립된 공간에서 능동적인 그림 작업을 해온 점 등을 근거로 내세웠다.

    재판부는 "그런 면에서 구매자들의 '구매 여부'나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작화가의 관여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조영남에게 피해자(미술품 구매자)들을 속일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아무리 조영남이 아이디어나 소재를 제공했다하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과정을 다른 사람이 담당했다면, 이런 작품을 자신의 창작물로 판매하는 것을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고 밝힌 뒤 "따라서 조영남이 구매자들을 상대로 '기망 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되나, 조영남이 일부 피해자와 합의를 하고 고령인 점 등을 고려해 집행유예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조영남의 법률대리인은 재판부의 유죄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며 곧바로 항소장을 제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앞서 조영남은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 중순까지 송기창 등 '대작화가' 2명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지시하고 자신이 가벼운 덧칠 작업을 가미해 총 17명에게 21점을 판매한 혐의(사기)로 기소됐다.

    조영남의 소속사 대표이자 매니저 장OO씨도 2015년 9월부터 지난해 4월 초까지 총 3명에게 '대작그림' 5점을 판매한 혐의로 함께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조영남과 장씨가 대작그림을 판매해 거둔 수익은 각각 1억 5,350만원과 2,680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조영남은 대작화가들로부터 1점당 10만원 꼴로 수백점의 그림들을 사들인 뒤 갤러리에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해왔다는 게 검찰의 주장.

    이와 관련, 두 사람을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긴 검찰은 지난해 12월 21일 열린 결심 공판에서 각각 징역 1년 6월과 징역 6월형을 구형했다.

  • 다음은 1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선고한 판결문 요약.

    조영남은 자신의 그림을 높은 가격에 판매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대작화가인 송기창씨가 그림에 관여했다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등, 고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으므로 조영남에게 피해자(미술품 구매자)들을 속일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미술계 관행이라고 주장되는 '조수를 두고 작업하는 방식'은, 반복해서 이뤄지는 '터치' 등에선 있을 수 있으나, 이번 사건에선 통용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송기창씨나 또 다른 대작화가인 오OO씨는 체계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이들로, 조영남과 비교해 숙련도 등에서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조영남의 그림은 송기창씨 등의 도움을 받은 뒤로 이전과 비교해 묘사, 원급법, 채색, 입체감 등에서 훨씬 풍부하고 발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림은 아이디어나 소재가 주는 독창성 등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표출·형상화하는 작업도 아주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봅니다. 이들이 참여한 작품의 난이도와 관여도를 고려하면 조영남의 조수로 단순한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대작작가들이 작품에 관여한 과정을 살펴보면 일단 그림에 필요한 각종 도구와 재료들을 스스로 선택해 구입했고 나중에 조영남이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이들은 별도의 독립된 공간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작업을 했는데 조영남은 작업실에는 거의 찾아오지 않다가 나중에 일부 덧칠·수정하는 정도만 관여를 했습니다. 조영남은 이들에게 언제까지 완성하라는 시간적인 제약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통용되는 조수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론적으로 조영남의 작업을 돕는 조수라기보다는 독립된 작가로 봐야 합니다.

    아무리 조영남이 아이디어나 소재를 제공했다하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과정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 한 것입니다. 이런 작품을 자신의 창작물로 판매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미술계의 관행이라고 간주하기 힘듭니다.

    앤디워홀 등의 경우는 정식으로 조수를 채용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작품을 구매한 이들도 당연히 해당 작품의 표현은 다른 사람이 관여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영남은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았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신이 그림을 그린 것처럼 말해 왔습니다. 조영남에게 대작화가가 있다는 얘기는 극소수만 아는 얘기일 뿐, 다수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습니다.

    피해자들도 애당초 해당 작품이 조영남이 그린 게 아니라면 구매하지 않았거나 그렇게 높은 가격을 지불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진술을 했습니다. 이처럼 구매자 입장에선 작가가 해당 그림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가 (구매 여부 판단에)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고, 가격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영남이 구매자들에게 조수의 관여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기망 행위에 해당합니다.

    조영남은 이번 사건으로 자신을 좋게 생각해온 일반 대중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줬고, '(조수를 두는 게)미술계의 관행'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국내 미술계에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또한 대작작가들의 노동 행위나 가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수많은 무명 작가들에게 상처와 자괴감을 줬습니다. 이는 절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다만 조영남이 고령인데다, 애당초 경솔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위적인 사기 범죄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 일부 피해자들과 합의를 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 일부 피해자들이 있는 점 등을 참작했습니다.